[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43]군위 의흥읍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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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있어서도 잘난 사람만 쳐다보이면 그것이 곧 불행의 시작이 될 수 있듯이 삶터 또한 그리되면 주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는커녕 오히 려 좌절감만 불러일으켜 종래는 애향심까지도 떨어지게 만들기 십상이다.
경북 군위군 의흥읍기(邑基)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필자의 눈에 는 그 터가 예나 지금이나 산자수명하여 사람이 살만한 길지로 보이지만 정작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 런데 그 이유가 실로 가당찮다. 의흥 땅이 소위 개발과 발전이라는 측면에 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데, 어찌 그런 한가 지 측면만 보고 삶터를 함부로 비하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하기야 국토를 연구하는 학자들마저도 특정 지역의 자연.인문을 망라하 는 총체적인 상(相)을 살피면서 그 지역이 지닌 장점을 부각시키려 하지는 않고, 오로지 개발과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지역성을 제멋대로 폄훼하기 일 쑤인데, 어찌 지역 주민들의 올바른 삶터 인식을 감히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어떤 지지서(地誌書)에, "의흥은 예전에 군과 현이 위치했던 곳이나 교통이 불편하여 지역 발전이 느린 편이다"라고 기술돼 있다면, 발 전이라는 개념은 차치해두고라도 그같은 의흥 땅 해석은 교통이라는 변수 를 과대 포장한 잘못된 해석임이 명백하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바로 그런 사려깊지 않은 해석이 의흥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터를 마뜩찮게 여 기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뿐이라면 그래도 다행이다. 그로 인해 지금의 의흥 사람들은 일제시대때 중앙선 철로 부설로부터 명기(明基)를 지켜냈던 조상들 때문에 오히려 의흥이 발전될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대체 발전이라는 개념이 무엇이건대 조상의 공덕을 그같이 욕되게 변 질시켜도 괜찮다는 말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난(亂)개발이 온 국토를 병 들게 하고 있는 마당이고 보면 아직도 우리는 바람직한 지리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땅의 진실된 얼굴을 바로 볼 줄 아는 안목마저도 갖추지 못한 게다.
그런 서양식 토지관에 못지않게 의흥사람들의 심리에 역기능적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얼풍수적 논리다. 어찌된 영문인지 종산(宗山)- 주산(主山)-명당-안산(案山)-조산(朝山)으로 이어지는 풍수국(局)의 체계 에서 그 모든 산이 그야말로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다. 종산인 선암산 (船岩山)이 인방(寅方.동북쪽)을 가리고, 조산인 팔공산(八公山)이 남쪽을 가로막고 있어 의흥에서는 큰 인물이 나지 않으며, 주산인 용두산 줄기마 저 나비의 모습을 빼닮아 늘상 한 군데서만 맴도는 듯한 형상이니 의흥 땅 이 발전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안산인 귀산(龜山)에 대한 오해는 더욱 기가 차다. 그 옛날 왕실에서는 의병이 봉기하여 나라에 큰 이로움을 주었거나 아니면 여타 의로운 일로 귀감을 삼을만한 고을이면 어김없이 의(義)자가 들어가는 지명을 부여하였 는데, 의성(義城), 의창(義昌), 의흥 등과 같은 곳이름들은 모두 그렇게해 서 생겨난 지명들이다. 그런데 귀산이라는 지명때문에 읍기가 발전되지 않 는다는 믿음에서 그 발전을 진작코자 "의롭게 흥하라"는 뜻으로 고을 이름 을 의흥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또 뭔가. 솔직히 말해 귀산이라는 자연 지명이 의흥이라는 인위적인 지명으로 바뀐 것만 해도 거의 개악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런 산이름을 군과 현의 명호로 사용했기 때문에 고을이 발전할 수 없었다니 대관절 말이나 될법한 소리인가.
그 옛날 왕조시대에는 혹여 왕실에 해를 끼치는 역적이나 반란군이 일어 날 양이면 그 지방의 명호를 강등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군, 현을 폐지해버 린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의흥읍기 풍수가 그 지경으로까지 타락하게 된 것은 작금의 우리나라 풍 수가 이기적이면서도 발복론적인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과 결코 무관 하지 않다. 인물풍수론은 어디까지나특정 터와 특정 인물간에 있을 수 있 는 상호 교감의 내용이 그 핵심이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이름깨나 날 리는 사람이 배출된 마을이라고 해서 무조건 명기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도대체 풍수에서 인물을 평가하는데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잣대로 사 용된 것이 누구에게서 처음 비롯됐는지는 모르지만 예전의 전통 풍수에서 도 그 사람의 인품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 풍수가 들이 주로 관심을 쏟고 있는 사회 지위적 인물풍수론은 그야말로 타락된 풍수의 극치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이다. 요컨대 의흥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큰 인물(?)이 배출되기를 소망하기 보다는 평소에 격의없이 지내는 이웃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인물풍수론에 도달 하는 길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개발과 발전 관념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어찌보면 풍수와 상극되는 관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풍수는 어 떤 땅이나 터가 지닌 본래의 자연성을 중시하는 반면, 개발이나 발전은 인 간을 위해 그런 자연에 일단 인위적인 힘을 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그 인위적인 힘이 도가 지나치면 누구나 오염된 환경에서 힘들게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발전에 초연할 것 같으면 그만큼 건강하고 호혜로운 자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어느 것이 더 미래지향적인 삶이냐는 의흥 사람들이 판단할 대목이지만 적어도 발전이라는 개념 때문에 스스로 삶터 자연을 비하하는 행위는 하루속히 청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뒷골(수북리.水北里)의 자연 관문을 이루고 있는 노지방산에 한번 올라 가 보라. 천작(天作)으로 휘어진 산자락에 다소곳이 안겨 있는 듯한 뒷골 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비쳐질 수가 없다. 어디 그뿐인가. 드넓은 탑 들 너머 동쪽으로 에투산과 용두산, 그리고 귀산이 마주보고 앉았는데 그 크기와 높이에 상관없이 장엄함이 느껴진다. 밀양인으로서 뒷골박씨(귀산 박씨 혹은 의흥박씨)의 분파조가 되는 박천이라는 사람이 고려말 기산군 (君)이라는 명호로 봉군(封君)된 연유를 가히 짐작할만하다.
만약에 의흥 조상들이 한 뼘의 농경지라도 아끼기 위해 마을을 산자락 의 품에 앉히고, 또한 산과 강과 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전키위해 일제시대때 철로 부설을 극구 반대했다면, 지금의 의흥 사람 그 누구도 감히 발전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그런 조상의 행태를 함부로 비난할 수 없으리라. 그래도 미심쩍은 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북 3리에 있는 귀산군의 재실인 무검재(懋儉齋)에 가보기를 권한다. 원래 그 곳은 마을을 둘러싼 지세가 보검의 자루와 같은 형상이어서 무검(舞劍)이 라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고려조에 대마도를 평정한 공이 있어 한때 영의정까지 지내고 또 한 공양왕으로부터 귀산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기까지 했던 귀산군이 벼슬을 그만둔 뒤에는 그 산 속으로 들어와 검소한 생활로 일관했으니, 무 검(舞劍)이 무검(懋儉)으로 바뀌게 된 데는 그같은 아름다운 사연이 전해 내려온다. 그런 덕행에 부합되게 에투산의 북록에 곤좌(坤坐)로 터잡고 있 는 귀산군의 묘또한 그 형세가 아름답기 그지없다.좌.우 지맥이 겹겹이 명 당판을 위호하고 있는 가운데 최외곽 백호지맥이 분묘 앞 왼쪽으로 길게 돌아 내려오면서 꽉 짜이게 안대(案對)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너머로는 의성 금성산의 봉우리 끝과 선암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러고보면 명당은 역시 덕을 쌓은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옛말이 영 빈말은 아닌 듯하다.
의흥읍기는 결코 예사로운 땅이 아니다. 용과 봉과 거북이 깃들인 신령 스러운 땅이자 자연의 생명력이 살아 숨쉬고 있는 빼어난 삶터 명당이다. 탑들 서쪽 끝에 비보숲을 길게 조성하고 노지방산 위에 정자라도 세울 것 같으면 읍기의 품격이 한층 더 높아질 것 같지만 그보다 먼저 의흥 사 람들은 자신의 삶터를 이기적이고 발복론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꾸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다. 의흥 조상들이 남긴 공동체적이면서도 실 천적인 풍수행태를 계승하는 길이야말로 의흥이라는 지명에 걸맞은 정의로 운 풍수를 구현하는 길임을 잊지 않도록 하자. 알고보면 자신의 행복과 성 취도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터의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 어리 석은 일도 없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의흥 땅은 정말로 살기 좋은 삶터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이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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