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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 42] 군위 義興邑基 (상) | ||||
현재 군위군 의흥(義興)의 공식적인 행정구역 명호는 면(面)이다. 그러 나 필자는 적어도 의흥면 소재지 터만은 읍기(邑基)라 칭하고 싶다. 그것 은 의흥면 소재지가 읍내리라 불리고 있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곳의 인구나 도시규모가 읍 수준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 옛날 귀산 현(龜山縣)과 의흥군(郡) 시절에 그 터가 그 일대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까닭도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곳은 읍으로 칭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을만큼 의미심장한 풍수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 다.
의흥 읍내리는 결코 삶터 양기(陽基)로서 그 어떤 천작(天作)의 명당 지 세에 터잡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과거에 의흥 조상들이 보여준 그 터에 대한 풍수행태만큼은 타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요즘 현지 주민들이 의흥읍기를 풍수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을 보면 실로 황당하기 그 지없다. 전통적인 참된 풍수가 계승되고 있기는 커녕, 그릇된 반풍수적 사고만 팽배해 있다. 그것은 동일한 삶터에 대해 의흥 조상들이 지녔던 풍수적인 관념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물론 그런 결과를 토지관의 변천으로 인한 풍 수적인 사고의 한 일탈 행위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같은 일을 자꾸 좌시하다 보면 종래는 그 터가 지닌 참풍수적인 내용마저 사장(死藏)될 게 뻔하기 때문에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 더구나 그것은 곧 의흥읍기 풍수 가 예전에는 지역민들에게 순기능으로 작용한 반면 지금은 오히려 역기능 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풍수사상의 사회적 계도 역 할 뿐만 아니라 의흥읍기 자체의 참된 위상을 확고히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그 터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만큼은 반드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의흥읍기의 지세는 누가 보더라도 탁월하게 빼어나지는 않다. 주변 산세 를 감안할 때 고을 뒤의 주산(主山)도 낮을뿐더러 그나마 서쪽 탑들쪽으로 지맥이 훤히 트여 있어 전혀 장풍(藏風)이 안되는 지세이다. 다만 한 가지 크게 위안되는 점이 있다면 산간취락치고 들(서쪽의 탑들과 남쪽의 장미 들)이 넓은 편이며 그 사이를 위천(渭川)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다. 물론 바로 그 점이 오늘의 의흥을 있게 한 근본적인 힘일테지만 필자 가 그곳을 답사하면서 정작 주목한 부분은 바로 옛 의흥 사람들의 풍수적 인 삶터 명당화 노력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터를 더없는 길지로 만들고자 한 소망은 그곳의 여러 지명(地名)에서 벌써 확연히 드러난다.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읍 기의 주산이자 진산(鎭山)격인 용두산(龍頭山)과 안산격인 귀산과 봉미등 (鳳尾嶝)이다. 먼저 그 산들의 내맥부터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낙동정맥 의 보현산에서 갈라져 나온 세 지맥들 중에 그 서쪽 지맥은 방립산(放立 山) 부근에서 또다시 모산(茅山.서북쪽), 선암산(船岩山.서남쪽), 화산(華 山.남쪽) 등의 세 줄기로 나뉘어진다. 그중에서 줄곧 서쪽으로 내닫는 선 암산 줄기는 의흥읍기 뒤에 용두산을 떨군 후 군위읍기의 주산을 이루는 마정산(馬井山)까지 이어지며, 남쪽으로 달리는 화산 줄기는 갑티재(甲峴) 에서 그 한 지맥을 서북쪽으로 치닫게 하여 조림산(鳥林山)을 솟구친 후 그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의흥읍기 앞쪽에다 귀산과 봉미등을 일궈 놓았다. 그러고 보면 의흥읍기의 주산과 안산은 말할 것도 없고 종산(宗山)격인 선 암산과 조산(朝山)격인 팔공산마저 모두 같은 부모, 같은 뿌리에서 배태된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사람들이 읍기 앞.뒷산을 각각 봉황과 거북, 그리 고 용의 형상을 한 영산(靈山)으로 상정한 데 있다. 물론 귀산처럼 영락없 이 거북이 물을 마시고 있는 듯한 이른바 금귀음수형(金龜飮水形)의 지세 를 갖춘 산도 있기는 하지만, 용두와 봉미는 아무래도 인위적으로 설정됐 다는 느낌이 강하다. 거기에는 아마도 예로부터 의흥 고을의 상징물이 되 다시피 했던 4령(四靈) 명승지를 갖춘 길지로서의 삶터 인식이 적잖은 영 향을 끼쳤음 직하다. 지금은 비록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우보면의 봉강(鳳岡: 봉황의 날 개), 의흥면의 귀산(혹은 龜頭山: 거북의 머리), 그리고 고로면의 인각(麟 角: 기린의 뿔)과 용아곡(용의 입) 등으로 뿔뿔이 나뉘어졌지만, 그것들이 군위군 효령면 병천교에서 동쪽의 위천 상류 방향으로 골짜기를 거슬러 올 라가면서 차례로 포진해 있는 점을 감안하면그 옛날 의흥군 시절에는 그 4령들이 지리적으로 한 영역에 속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지세의 형상이 오죽 빼어났으면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지금의 의흥 읍내리를 중심으로 하 는 그 일대의 지역을 귀산현이라 이름하고(의흥이라는 지명은 고려초에 처 음 생겨 사용되기 시작하다가 고려말기 이후 귀산으로 도로 환원되었다가 조선조 임진란 이후부터 또다시 사용돼 내려왔음), 또한 4령현이라는 별칭 까지 덧붙였겠는가. 의흥 땅은 원래부터 신령스럽고 기이한 동물들이 깃들 인 터라는 얘기가 구전돼 오고 있는 것만 봐도 의흥 조상들이 용과 봉황을 그들 삶터 읍기내 지명으로 거침없이 끌어들인 이유를 이제는 충분히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어디 그런 지명을 통한 삶터 명당화 노력뿐이었겠는가. 탑들 한가운데에 이색적으로 우뚝 솟은 석탑 한 개가 놓여 있는데 그 분위기가 자못 예사롭 지 않다. 그 석탑이 세워지게 된 내력인즉, 그 옛날 읍내리에 이해못할 참 변이 자주 일어나 주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었는데, 어떤 도사가 이르기를 위천 남쪽에 위치한 배일(지금의 梨枝1리)앞 바위가 마치 갑옷을 입은 무 사가 창을 들고 마을터를 향해 쳐들어 오는 형상인지라 그곳에 석탑을 세 우면 재난을 막을 수 있다고 해서 주민들이 합심하여 길일을 정해 5층석탑 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풍수 비보탑(裨補塔) 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자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봉황의 꼬리, 즉 봉미등의 일부를 이루는 배일동네 앞 바위가 어 째서 갑자기 창을 든 무사로 바뀌었는가 하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그런 보기 싫은 지세를 비보하는 방법이 과연 탑을 세우는 방법밖에 없었던가 하는 것이다. 지세의 형국은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전자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후자는 아무래도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법하다. 이 를테면 위천변 양쪽에 비보숲을 조성하여 그것이 안보이도록 가리는 것인 데, 만약 그 방법을 썼더라면 오늘날 의흥읍기의 경관(景觀)은 한층 더 높 은 품격을 지닐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기야 공동체적 염원을 담은 그 오랜 역사의 5층석탑마저 1988년에 도난당하고 새 석탑이 1995년 12월20일 자로 복원된 마당인데 설사 그런 비보숲이 있었다한들 그것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전돼 왔으리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가 뭐라하든 의흥 조상들이 보여준 풍수행태적 백미(白眉)는 역시 일제시대때 중앙선 철도 부설로부터 읍기를 지켜낸 일일 것이다. 일 제는 원래 지금처럼 철로가 산성면 화본(花本)과 우보면 이화(梨花), 그리 고 의성 탑리(塔里)로 길게 우회하는 노선이 아닌, 갑티재 터널과 의흥을 곧장 지나 바로 탑리로 연결되는 거의 직선에 가까운 노선을 설계했던 것 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당시 귀산박씨(혹은 의흥박씨)를 비롯한 여러 양반가문들이 삶터를 지키기 위해 굳세게 저항하자 어쩔 수 없이 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반대 명분이 이른바 철마(기차)가 들어와 울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 정감록설(鄭鑑錄說)에 있었든, 아니면 얼마 안되는 경지마저 철로 부설에 흡수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했든 알고보면 그것은 그리 중요 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의흥읍기가 예전과 다름없이 지금도 건강한 모습으로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닌게 아니라 봉미등에 올라 읍기쪽을 바라보는데 온통 생명의 기운 일 색이다. 용두산의 몽글몽글한 봉우리들은 기(氣)의 결정체나 다름없어 보 이고, 살아 숨쉬는 듯한 위천의 물줄기는 하늘빛보다도 더 눈부시다. 거기 에다 고즈넉한 정적마저 감도는데 누가 감히 그토록 생명력이 넘치는 터전 을 청룡, 백호의 사신사(四神砂)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느니, 혹은 지세의 형국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비방할 수 있으리요. 그것은 그야말로 다 썩은 도회지의 하천 물줄기를 놓고 패철을 만지작거 리며 수구(水口), 득파(得破)를 논하는 작태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의흥 사람들도 반풍수적 논리에 오염돼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그 같이 양명한 자신들의 삶터 본색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제멋대로 그 터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실정이니 실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사정이 그럴진 대 어찌 풍수 위의 풍수를 새삼스레 절감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풍수학자.지리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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